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800 생의 인연
스승과 제자는 800생의 인연으로 부모형제 보다도 더 진한 인연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길러주고 가르쳐 주었지만 부모자식 간의 애정 때문에 자식들로 하여금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가르침을 통하여 무명에서 벗어나 번뇌를 끊고 생사를 극복하게 인도하니 그 은덕은 무량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부모가 낳아 기르고 가르친다고 하나 능히 삼악도(三惡道)를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스승은 대자비심으로 출가를 권유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하나니 이는 곧 아라한의 태(胎)를 잉태(孕胎)하여 아라한의 과(果)를 출산하는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을 떠나 열반의 낙(落)을 얻게 하는 것이며 법(法:진리)으로서 나를 낳아준 법(法)의 부모가 되느니라."
한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도(道)를 향(向)하더라도 자리(自利)는 될지언정 스승의 이러한 은혜를 갚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천하의 선지식이라도 스승보다 뛰어난 이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유교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동일선상에 두고 예우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스승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목을 두루 갖춘 덕인(德人)으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공경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서양의 교육관은 스승과 제자는 가르침을 주고 받는 관계를 떠나면 평등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아니라, 한 분야의 지식만 갖추어도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원래 출가한 스님들은 가정이 없고, 처자식이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자식이 되는 것이고, 이를 상자(上資) 혹은 상좌(上佐)라고 합니다. 상좌(上佐)는 행자를 데려다가 승려로 만드는 제자 은상좌(恩上佐)와 스승의 법맥 법통을 전수받는 제자 법상좌(法上佐)가 있습니다. 사미계, 비구계, 구족계 등의 계를 받은 제자를 수계상좌(授戒上佐)라 하며, 이를 계좌(戒佐)라고도 합니다.
인연을 맺기 위하여 선(禪)을 전해준 제자, 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속가의 양아들 제도처럼 이들 상좌들이 은사스님들을 부모처럼 모시는 것입니다. 한 점의 혈육도 나눔이 없는 사람들끼리 부모형제간의 관계보다 더 진한 자비와 은혜를 나눔은
그들의 관계가 육백생, 칠백생 보다 더 많은 팔백생의 인연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백생의 인연은 바로 팔정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팔정도의 바른길로 인도하고 바른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견(正見) 은 바로 보고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로, 사성제와 십이인연(十二因緣)법을 바르게 이해하여 불교의 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정립하고 전수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바로 볼 줄 알아야 하며, 스승이 탐욕심에 빠져들면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검사 돈도 선생은 먹는다." 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촌지 아닌 뇌물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무서운 검사님도 자기 자식들의 교육 때문에 학교 선생님께 뇌물을 받친다는 것입니다. 뱃장 좋은 일부 악덕 스승님은 뇌물액수를 아예 책정하여 치부책에 올려놓고 정기상납을 받았다는 언론보도도 있습니다. 학생을 제자로 본 것이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황금거위로 본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스승의 올바른 생각이 요구됩니다. 이를 정사유라고 하는데, 정사유(正思惟)는 언제 어디서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항상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살아있는 교육의 주체이고, 스승의 생각이 바로 경전이고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법구경에 나오는 게송(偈頌)입니다. 같은 경전, 같은 책, 같은 학문이라도 가르치는 스승의 이해와 생각에 따라 180도의 차별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졸대밭에 졸대 난다”고 했습니다. 스승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라야 제자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것입니다.
스승의 올바른 생각의 전달 그것을 정어(正語)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어(正語)는 거짓말이나, 욕설이나, 험악한 말,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저기 가서는 저 말을 하는 두 가지 말로서 남들을 이간질하는 양설(兩說), 남의 관심과 환심을 사기 위하여 비위를 맞추고 알랑거리는 아부(阿附) 성 짓은 말, 기어綺語)를 하지 않고 진실된 말 진언(眞言)과 정어(正語)로 가르치고
바른말을 하는 삶을 살아가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천수경 첫머리에 나오는 정구업진언 입니다. 부처님이 설(說) 하신 10 악업(惡業) 중에 입(口)으로 짓는 구업(口業)이 가장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거짓말 망어(妄語)가 더 큰 죄가 됩니다. 망어 중에서도 가장 큰 죄는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것과 깨우치지 못해서면서도 깨우친 척하는 거짓말입니다. 이 땅의 왜곡된 가르침을 전달하는 일부 스승님들과 성직자님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고 머리 숙여 참회해야 할 대목입니다.
대한민국은 자칭 득도한 도사님들, 자칭 깨달음을 증득한 부처님들, 자칭 강림한 예수님들, 자칭 하강한 미륵님들이 셀 수도 없이 무진장으로 많고 넘치는 도사천국이고 사기천국의 나라입니다. 가르치는 스승이나 성직자는 정어(正語)로 가르쳐야 합니다. 배우는 제자들도 정신 바짝 차리고 정어(正語)를 가려서 듣고 배우는 혜안과 지혜를 닦고 쌓아야 합니다.
이제는 제자가 스승의 옥석(玉石)을 가려야 하는 두렵고 안타까운 오탁악세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스승은 스승대로 제자는 제자대로 바른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정업(正業)이라고 합니다. 정업(正業)은 살생, 투도(偸盜), 사음(邪淫) 등의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고 올바른 행위로 스승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고 제자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혀가 짧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바람풍(風)자(字)를 가르치는데 혀가 짧은 그는 바람풍(風)이 아니라, 혀 짧은 발음 바담풍! 바담풍!으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귀는 정상인지라 자기 소리 '바담풍'은 듣지 못해도 제자들이 하는 '바담풍' 소리는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니 바담풍이 아니고 바담풍이야! 정신 차리고 따라 해 봐!"
“바담풍, 바담풍, 바담풍!" 제자들이 따라 했습니다.
스승 본인은 바람풍으로 발음한다는 것이 바담풍이 되고 있었고 수많은 제자들이 자질 없는 스승 때문에 바람풍을 받담풍으로 잘못 배우고 잘못 아는 우(愚)를 범(犯)하고 만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들이 참 교육의 본질을 벗어나면 교육현장은 무너지고 맙니다. 성직자들이 성직자의 본질을 벗어나면 그 종교의 파멸을 가져옵니다. 자기네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온갖 수단방법을 제다 동원하여 치부(致富)하면서 신자 신도들에게는 욕심 없이 살라고 가르친다면 따르겠는가?
자기들은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외제 승용차 타고 다니며 호화호식 하면서 제자들에게 신도, 신자들에게 청렴 결백하게 살라면 누가 따르고 누가 지키겠는가?
지키지 못할 계율이라면 계를 받지 말고 출가하지 말아야 하고, 따르지 못할 선서(宣誓)라면 성직자(聖職者)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선서(宣誓)를 안 따르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을 속이고 하느님을 기만하는 중죄를 범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슨 놈의 법문(法問)을 하고, 설교(說敎)를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신도, 신자들을 교화하고 가르친단 말인가? 윗물이 맑아야 아래 물도 맑은 법입니다.
내가 가진 위치와 직책에 어울리는 올바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명(正命)이라고 합니다. 정명(正命) 은 바른 직업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스승다워야 하고 제자는 제자다워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답고 신부는 신부답고 스님은 스님다워야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가 맡은 바 직분대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토각구모(兎角龜毛), 옛날 조사(祖師) 스님들은 출가 수행자들에게 벼슬과 감투는 토끼 뿔, 거북 털에 불과(不過)하다고 경계했습니다. 아예 외면하고 수행과 중생구제에 매진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분들의 법맥을 전수받았다고 큰소리치고 자부하는 스님들이 감투선거를 치르고 감투싸움을 합니다. 스승이나 성직자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하여 제자와 신도 신자를 가르치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기 수행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합니다.
정정진(正精進)은 언제나 선(善)을 증대(增大)하고 악을 제거하는데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스승이나 성직자는 모름지기 피눈물 나는 인욕의 정진을 해야 합니다. 성철스님은 수행정진을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수행자를 두고, 시주물(施主物) 축내는 도둑놈이라고 혼줄을 내고 크게 경책 하셨습니다. 정정진은 바른 수행을 말합니다.
사실 불교는 형이상학적 논리로 접근하는 종교인지라 출가스님들을 위한 전문 수행법은 전수되고 있으나 재가불자들을 위한 수행방법은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중구난망식 입니다. 사찰에 따라 다르고 스님에 따라 틀리고 같은 스님도 상황에 따라 다른 기도 방법을 가르칩니다. 올바른 목표의식이 없고, 즉시(卽時) 즉흥(卽興)으로 판단과 가치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하고, 올바른 목표와 언제나 변함없는 가치관, 이를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정념(正念)은 언제나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이상과 목적을 잊지 않고 생활화하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정념(正念)은 지나간 과거의 업장에 매달리거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려야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원한과 분노와 미움을 쌓게 되고 미래를 걱정하면 불안과 탐욕과 재물에 집착하게 됩니다.
스승이 흔들리면 교육이 흔들리고, 성직자가 흔들리면 종교가 흔들리고 사회가 흔들립니다. 불제자가 흔들리면 불교가 흔들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흔들리고 사찰이 흔들립니다. 그러다 보면 사회가 흔들리고 국가가 흔들리고 민족의 흔들리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나가야 할 앞길이 어둡고 깜깜합니다. 이것을 오탁악세라고 합니다.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아침저녁 예불을 드릴 때 올리는 칠정례의 예불(禮佛) 문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등불을 중국을 거쳐 이 땅에 오늘까지 꺼뜨리지 않고 이어 온 미진수의 역대조사님께 귀의를 올리는 게송입니다.
선지식은 아무나 될 수가 없습니다.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하고 팔정도의 실천을 통한 가르침만이 올바른 가르침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 공간 사찰을 밝히는 대부분의 석등(石燈)은 팔각(八角) 받침과 팔각지붕으로 조성(造成)되어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관계도 서로 별개가 아니라 이처럼 팔정도를 통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인생의 올바른 길잡이가 되고 올바른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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