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600생의 인연이다.
불교를 흔히 인연의 종교라고 합니다. 인연을 빼고서는 불교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전생에서 빚쟁이들이 만난다고 합니다. 형제 자매는 전생에서 경쟁자들이 서로 만나고, 부부사이는 전생에서 원수들이 만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바세계 일체중생들의 인연이란 모두 원한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새로운 인연은 새로운 원한을 만들어가는 윤회의 쇠사슬에 묶이고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이 도는 것입니다. 원한의 대상이 없다면 악연의 고리가 끊어져 사라질 것인데 탐, 진, 치 삼독의 중생심으로 끊임없는 원한의 대상을 만들어 삼악도(三惡道)의 악연을 만들고 쌓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중생이 모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이는 모두가 부처님이 될 수 있건만 중생들의 생각이 전도(顚倒)하여, 세간에만 탐착하고 벗어날 요령을 알지 못하며 고통의 근본을 세워 원수를 기르나니 그럼으로 삼계(三界)를 윤회하고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를 윤회하며 몸을 버리고 받길 거듭하며 잠깐도 쉬지를 못한다."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암매(唵昧)한 생각을 서로 전하면서 무명(無明)에 눈 가리우고 애욕에 빠져들어 삼독심을 일으켜 악연의 대상과 악연의 인과(因果)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생의 죄악이 무량무변하여 원한의 대상들이 서로 만나 악연을 쌓는 무서운 고통의 업장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들이라 무명은 지혜를 덮었고, 번뇌는 마음을 덮어서 스스로 알지를 못하고 스스로 전도몽상을 일으켜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맺힌 원결을 풀어 나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중생이 선업을 쌓고 수행을 통하여 해탈열반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악업을 짓고 악연을 쌓아가며 스스로 악도를 헤매는 것을 보면 누에가 스스로 제 몸에서 실을 뽑고 스스로 집을 지어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것과 같이 무량한 고통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눈으로는 좋은 빛을 탐하고,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를 탐하고, 코로는 향기로운 냄새를 탐하고, 혀로는 내입에 맞는 입맛을 탐하고, 몸으로는 보드라움을 탐하여 항상 5진(塵)의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깨달고 보면,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일가친척들이 모두가 다 삼세(三世)의 원수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원한의 대상들은 모두 다 친한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친한 사이가 없다면 원수도 원수의 대상도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곳에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서로가 아예 원수질 일이 없습니다. 서로가 원한의 대상이 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원한을 일으키는 중생들은 서로가 친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서로의 욕심으로 인하여 충돌이 생기고 충돌에 의하여 원한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일가권속 친구들이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원망하고,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자매도 서로가 원망합니다. 조금만 뜻이 안 맞아도 화를 내고 원망합니다. 사소한 재산다툼으로 다투고 살생까지 불사하기도 합니다. 백번 잘해주다가도 한번 마음에 쾌하지 않으면 분노하고 외면합니다.
중생의 마음이란 잠깐만 다른 생각을 품으면 곧 나쁜 생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사소한 다툼으로도 서로 원수를 맺고 세세연연 대대로 악연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우리가 그렇게 미워하고 저주하는 삼세(三世)의 원수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전생의 나의 부모형제자매 일가친척들임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부모형제자매 일가친척이 내세(來世)에는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제대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육백생(六百生)의 인연이 있는 빚쟁이들 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전생에서 빚을 쓴 사람이고 자식은 전생의 빚을 받기위하여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인지 부모가 자식들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자식은 부모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랍니다.
사실 부모 자식 간에는 서로 아까운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 있어서나 자식들이 노약한 부모를 봉양하는 과정에서 아끼고 타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 것이 자식 것이고 자식 것이 부모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부처님께 보시(布施)하는 마음이 필요로 합니다.
보시에는 재물로 하는 재보시가 있고, 가르침으로 하는 법보시가 있고, 서로가 서로의 두려움에서 구원해주는 무외(無畏)보시가 있는 것처럼 부모자식의 관계가 바로 이런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모 자식 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법으로 강제되기 이전의 인륜도덕의 도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계율(戒律)이라 하고 따르고 실천하는 것을 지계(持戒)라고 합니다. 스스로 알아서 지켜가는 진리의 법칙입니다. 유교에서는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천륜(天倫)이라고 합니다. 내 부모만 아니라면, 내 자식만 아니라면, 패주고 싶고, 고발하고 싶고 안 할 말이지만, 죽이고 싶을 때도 허다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내다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재산 때문에 원한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천륜을 거부하는 끔직한 경우가 실제로 언론지상에 종종 보도 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이고, 부모자식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부모자식간의 천륜은 모든 욕망 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불교의 보시하는 마음, 지계하는 하는 마음, 인욕 하는 마음으로 베풀고 보살펴야 합니다. 보시, 지계, 인욕의 마음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며, 가정교육을 통하여, 학교교육을 통하여, 사회교육을 통하여 체득(體得) 되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교육이라고 하고 불교적 용어로는 정진(精進)이라고 합니다.
교육을 통하여 천륜(天倫)을 알게 되고, 인륜(人倫)을 알게 되고, 인과(因果)를 알게 되면, 탐(貪)진(嗔)치(痴) 삼독의 욕망이 사라집니다. 욕망이 사라진 청정한 마음을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볼 수 있는 마음, 무심(無心)이요.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智慧)이고 반야(般若)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모자식간의 육백생(六百生)인연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을 백번을 지키고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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