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목표는 영원한 행복이다!(성철스님 법문)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삼대 종교의 하나로 일컬어집니다. 이들 종교는 저마다 내세우는 교리가 다르므로 그 내용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와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종교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서울로 간다고 할 때에 북쪽에서 가든 남쪽에서 가든 바다에서 가든 육지에서 가든 비록 그 방법과 수단은 제각기 다르지만 서울에 간다고 하는 근본 목표는 다 같듯이,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공통되는 종교의 목표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 고통과 번뇌가 가득찬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이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로서 영원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 곧 생멸의 차 안(此岸)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저 세계, 곧 해탈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의 근본 목표인 영원한 행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은 이 유한한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불교에서는 그 궁극의 목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 [기신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
이 말씀은 모든 괴로움을 다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 곧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멸세계를 떠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해탈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반의 종교가 갖는 목표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와 '유한'의 생면세계를 버리고, '절대'와 '무한'의 자유세계에 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에 누가 서울에 간다고 한다면 왜 가는지 까닭부터 알고 가야지 무조건 서울만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일 터이요, 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터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유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왜 가려고 하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부터 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인간은 그 모든 생물과 무생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라 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인간은 대체로 삶을 값어치 있게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못함 사람도 있고, 또 사람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말론하고 뭇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과 가까운지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지어 산다는 것조차도 짐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삼계란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를 일컫는 말인데 이것을 불타는 집이라고 하고, 사생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일컫는 말인데 그 전체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끝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가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인생을 전체로서 볼 때는 괴로움의 연속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토록 괴로운 삶이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고생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생스러운 삶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유한하여서 모순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세계란 곧 투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고 하여도 곧 종말이 오고 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서부터 인간의 종교가 성립된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안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구상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취지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저 먼 피안의 세게에서만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빌어먹는 거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때가 되어 밥 한 끼 잘 얻어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지로서는 밥 한끼 잘 얻어먹으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만족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때와 장소와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거지가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이란 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몇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록펠러
첫 번째로 록펠러(1839 - 1937)의 경우를 봅시다. 미국이 록펠러 1세는 당대에 자수성가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 아흔아홉 살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누가 보든지 참으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아 세계적인 재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뿐더러 나이 아흔아홉 살이 되도록 장수하였으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욕심이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록펠러는 말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암이란 지금의 발달된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못하는 병인데 오십 년 전인 그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갑부로서 온갖 부를 누렸고 또 아흔아홉 살의 천수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싶은데도,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려 곧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일 년 더 연장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온 세상에 광고를 내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광고비만도 이백만 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이백만 불이면 엄청난 돈입니다. 아마 이백만 불이 아니라 이백억 불을 들인다 해도 목숨을 연장하는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겁니다.
록펠러가 낸 광고를 보고 의학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이 록펠러를 한 해라도 더 살려놓으면 자기가 세계적인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서 각양각색의 방법을 다 동원하고 제시하였읍니다만, 결국 록펠러는 더 살지 못하고 아흔아홉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좀 더 살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닙니다. 저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개미나 벌레까지도 죽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좀더 오래 살았으면, 좀더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은 모든 생명을 가진 생명체의 본능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산다 해도, 그것은 어느 한순간이면 끝나고 맙니다. 이 유한한 생멸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사람의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맹상군
호화롭고 부귀한것이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 년이 못 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람인데, 왕자(王者)로서 정승을 지낸 이로, 천하의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산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맹상 군이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세상의 행복을 누리며 산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상군도 백 년을 못 살고 일흔이 가까워서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때의 그의 공명에 따라 장례를 후히 지내고 그 무덤도 산과 같이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이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는 무덤 옆에 밭을 갈던 농부가 제 땅을 넓히려고 맹상군 무덤 위에다 밭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호화롭게 살던 맹상군도 그러한데 하물며 특별히 두드러진 것 없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3. 진시황
그 유명한 진시황(기원전 259 - 210)의 경우는 또 어떠한지 봅시다.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맹상군보다 후대의 사람으로 6국을 정벌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진나라 대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영웅 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어 아방궁이라 불렀는데 집의 길이가 무려 칠백 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양의 궁궐 둘레가 사십 리라고 하니 진시황의 궁궐 둘레는 천리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뒷날 항우라는 장사가 나타나서 진나라를 패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우는데 석 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집이 다 타는 데에 석 달이나 걸렸으니 아방궁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그렇듯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사스럽게 살면서도 딱 한 가지 자기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의 권세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기운은 자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令)을 내려 죽지 않는 불노초를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수만 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 씨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불사초라고 하는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 약초를 케오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 씨가 대답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삼천 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 주시면 가서 불사초를 구해 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서 씨의 요구대로 동남동녀 각 삼천 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따위를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사초를 캐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씨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시황이 호사가 넘치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라의 팽조가 팔백 년을 살았지만 끝내 죽고 말았는데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하고 생각한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좋은 섬에 가서 자기의 왕국을 하나 만들어 잘 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하여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바위에 '서씨각(徐氏刻)'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씨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앞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하였던 서 씨는 그렇게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배에 싣고 제 갈 길로 가버렸고, 이를 알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사초를 구해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자기가 서 씨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제 아무리 진시황이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여산에 터널을 뚫고 산 밑의 흙을 다 파내고 지하 궁궐을 짓도록 하였읍니다. 또한, 죽은 뒤에도 음식을 차려놓고, 궁녀 가운데서 아름답게 생긴 궁녀 삼천 명을 뽑아 언제든지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에 있는 방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삼천 명을 뽑아 묘를 지키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해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유방과 항우가 들고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태우고, 여산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 있는 삼천 명의 궁녀들을 살려주어 제 갈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삼천 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궁녀는 놔주기가 싫어서 자기가 차지했으니, 그 미인이 천하에 유명한 "우미인"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오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하늘을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항우가 당장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천리마는 버려도 우미인은 버리기 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둘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와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의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을 누렸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 궁녀를 그 속에 가둬 춤추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 했어도, 결국 영원한 행복은 성취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그 행복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런 일들이 앞에서 본 록펠러나 맹상군이나 진시황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 귀천에 관계없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그와 같은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곧 죽게 된 사람도 죽음을 피하고 좀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 강한 권력이나 명예나 금력을 가졌다고 해도 실제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종교가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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