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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원인과 조건의 법칙

by 게으른수행자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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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조건의 법칙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는 세계의 바탕은 무엇하나도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는 없다.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렇게 있어 보이는 것이라 해도 그렇게 되게 한 원인과 조건만 사라지면 그렇게 있던 것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수없이 생겼다가 사라져 버리므로 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변화무쌍한 것들이라 해서 조화와 질서가 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한 현상계속에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 법칙에 따라 변화무쌍한 현실세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무상한 현상 속에는 무상하지 않은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살펴보자.


1.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이 있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 간단한 비유이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서는 원인과 결과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씨앗으로 뿌린 콩과 다시 열매로 열려진 콩이지만 꼭 같은 콩이 아니다. 그래서 씨앗으로 뿌려진 콩을 인(因)이라 하고, 결실되는 콩을 과(果)라 한다.

 

우리가 선행을 한다 해도 선의 결과가 있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있음은 '다르게 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종류의 품종에 대하여 품종개량을 시도 하는 것은 이 '다르게 익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선행을 하고, 악행을 하였을 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 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2.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는 있으나 반드시 씨앗만 있다고 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여건이 모여야 한다. 연(緣)이란 말은 '---으로 향해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인을 도와 어느 방향으로 향해 가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연화합 (因緣和合)이라 한다. 위에서 이숙과(異熟果)고 할 때 '어떻게 다르게 익느냐' 하는 것은 바로 연(緣)의 작용이다.

 

연(緣)의 조건에 따라 본래의 씨앗보다 좋은 열매가 열리기도 할 것이고 본래의 씨앗보다 못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할 것이다. 좋은 여건을 만들면 좋은 결실 을 거둘 것이나 나쁜 여건을 만들면 좋지 않은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적 사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善)의 환경이 있을 것이며, 악(惡)의 환경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똑같은 생(生)이지만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되는 것은 환경이라는 여건의 작용이 크다 할 것이다.

 

우리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좋은 연(緣)을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꼭같은 사람이지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세월이 흐르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지식을 가까이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삿된 사람을 가까이 하면 삿된 사람이 될것이고, 올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면 정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꼭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종사하는 분야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씨앗을 직접적인 원인(親因)이라 하고 싹이 터서 자라게 한 조건을 간접적이라 하여 소연(疏緣)이라 말한다. 원인만을 보는 것을 숙명론이라면 조건을 중요시하는 것을 창조적이라 할 것이다.

 

불교에서 인연이나 인과를 설하고 있는 것은 원인을 중요시 하는 것이라기 보다 현실적인 연(緣)을 중시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경전에 '사람은 그 출생에 따라서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출생에 따라서 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행위에 따라서 천한 사람도 되고 성스러운 사람도 된다'고 하였다.

3. 씨앗만 있어도 안되고 좋은 조건만 있어도 결실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씨앗은 조건을 필요로 하고, 조건은 씨앗을 필요로 한다. 서로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은 씨앗이 열매를 맺었으나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일회성이 아니라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한다. 시간적으로 '이것이 일어나서 저것이 일어남'이 되니, 제행무상한 생멸변화의 질서관계이고, 공간적으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게 됨'이라는 제법무아한 의존의 조화를 이룬다. 질서를 이루고 있어 원융 (圓融)이요, 조화를 이루고 있어 무애(無碍)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어 원융무애한 중중무진인연(重重無盡 因緣) 관계를 이루고 있는 불가사의한 법계(法界)를 보이게 된다. 한톨의 씨앗 속에 한해의 모든 것들이 들어있어 우리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 方)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음이기도 하다.

4.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시도 쉴 사이 없이 변화하고 있다.

세계 자체가 움직음을 속성으로 하고 있음을 제행무상에서 고찰하였다. 그러나 천차만별한 삼라만상의 변화를 유지시켜 주는 원리(法)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무상한 것들 속에 항상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주법계(法住法界)라 한다. 이러한 법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법계에 그냥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이고 그것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구루손이라는 목장 근처에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있는 것이다. 여래께서 스스로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고, 모든 중생을 위하여 쉽게 분별하여 펼쳐보여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되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러한 모든 법은 법주 법공 법여 법이하여 법은 현상 그대로의 모양을 떠나 있지 않고, 현상 그대로와 다르지도 않다고 하셨다.

 

법은 삼라만상 가운데 있는 것이 법주(法主)이고, 인연으로 모여 있어 본 바탕이 텅비어 있는 것이라 함이 법공(法空)이며, 현상계 모양 그대로라고 함이 법여(法如)라는 것이며, 법은 인위적 조작을 가하지 않고 스스로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라 함이 법이 (法爾)이다. 그것은 본래 자연적이라 하여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고도 말한다.

 

위에서 부처님께서 이러한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등(等)은 평등이니 일반적, 보편적 이라는 의미이고, 정(正)은 옳음, 바름이니 타당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등정각이란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타의 교설을 믿는 사람에게만 타당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당하지 못하면 보편성이 결여되어 진리라고 할 수가 없다. 시대의 조류나 유행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여 보편적이라 해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지 못하여 타당성을 잃어버리면 그것 또한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타의 교설로서 법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그 누구라도'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열려 있는 진리이다. 불교는 과학이 있어 과학과 충돌하지 않고, 철학이 있어 철학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불교사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설사 부처님께서 깨달아 가르치신 법이라 해도 부처님 또한 법 안에서의 존재이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별개의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이다. 다만 법을 법답게 보시고, 법답게 받아들여, 법답게 사시다가, 거역하려 들지 않고 법답게 거두심이다.

 

무상한 법 속에 무상한 존재로 계셨으니 인연이 다하심에 무상하다는 법을 힘주어 가르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직 법에 의지할 것을 말씀하셨다. 법만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그 누구라도 무상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던 중생(모든 생명)은 일찌기 없었다.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것들도 무상 앞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불교의 뛰어난 진리성이며 객관적 보편성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 육신으로 사바에 출현하셨던 석가모니 자체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 앞에서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덕이 훌륭하고 거룩하여 그분 앞에 공경심을 표하는 것이지 맹목적으로 매어달림이 아니다.

 

경전에 '물질적 존재인 육신으로 나를 보려 한다거나 말소리에 매달려 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이므로 끝내 나를 볼 수 없다'고 하셨음을 잘 알아야 할것이다. 이것은 가르침인 법을 보라는 것이요, 법을 통해서만이 불타를 알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만약 연기를 본다면 그것이 바로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본다는 것은 바로 연기를 보는 것이다' 라고 하셨고, '연기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이 되리라, 참으로 법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 되니라' 고 하셨으며, '법을 본다는 것 은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불교인이 불교인다워지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하여 법을 바르게 보는 데서 시작한다. 바르게 보지 못하는 데서 인간고(人間苦)는 발생하고, 지혜로서 바르게 보는데서 생의 즐거움은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이 보아야 할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그것이다. 삶의 눈앞에 있는 것이듯이 법도 눈앞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깨달음이라는 것도 목전(目前)에 있는 것이다. 즉 해탈은 현전(現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 후에 극락에 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법답게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살아 생전에 법답게 보고 법답게 산 사람은 이미 해탈을 누리고 열반을 얻은 사람이니, 죽은 다음에도 극락에 왕생한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전하는 법 가운데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증득하여' 현실의 법 가운데서 즐거움을 얻어 현재의 법 가운데서 기쁘게 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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