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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수행.공부

절수행으로 10년간 300만배 회향! (동기부여가 필요할때!)

by 게으른수행자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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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린씨

절수행으로 10년간 300만배 회향!

절은 현대인 위한 탁월한 수행
나이 40에 발심… 절하며 삶의 가치 깨달아
매일 300배…7년째 매달 3000배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성인(聖人)의 경지와 같을 순 없지만 나이 40인 불혹이 되어도 흔들리지 않기는 커녕 뜻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살다가는 불자된 고마움은커녕 사람 몸 받은 감사함도 모르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뭔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됐다. 머리로 이해하는 불교가 아닌 몸으로 행하는 불교가 절실히 필요했다. 열심히 하지도 않고 잘 되지도 않는 화두참선은 더 이상 미련 두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절수행으로 흐릿한 신심부터 확고하게 다지고 싶었다. 한 10년만 투자하면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에 들었다. 그래서 10년간 100만 배를 목표로 절수행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10년 전에 시작한 절수행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남해 보리암에서 24년 전, 하루 4000배씩 삼칠일 동안 8만 4천 배 기도를 회향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절하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 동안 놓아버린 수행의 끈은 나를 꾸준히 하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하다말다의 반복이었다. 한결같지가 않았다. 마음도 덩달아 좋다 말다 변덕이 심했다. 도대체 아침 예불과 매일 108배 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렵고 대단한 일이라고 이것도 못하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또 나를 괴롭혔다.

 

하루 밥 세끼는 꼬박꼬박 먹을 줄 알고, 매일매일 몸 눕힐 줄은 알면서도 마음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은 어찌 이리도 익숙하지 않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럭저럭 2년 가까이 지내다 어머님 상을 당한 후 새롭게 발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육신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불문으로 인도해 주신 어머님과의 이별은 내 수행의 고삐를 더욱 바짝 당기게 만들었다. 
어머님은 말년의 극심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셨는데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적당히 하는 시늉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행하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절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더 쏟아부었다. 그래서 매일 108배를 거르지 않는 것은 물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요일마다 1,080배 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점차 절하는 일이 몸에 배는 듯 했고, 신심도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대로는 일 년에 10만 배를 넘기기 어려웠다. 어느 세월에 일 년에 10만 배 해서 100만 배를 채우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좀더 강도를 높이기로 했다. 일 년에 두 번 밖에 하지 않던 3000배를 매월 하기로 하고 매일 한 번만 하던 108배를 하루 세 번 이상을 하기로 했다. 98년 정초부터는 지금까지 해 온 절 숫자는 모두 무시해 버리고 다시 계산하기로 했다.

 

그 해 정초부터 일기장에 꼬박꼬박 기록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절한 숫자를 적고 한달 한달 절한 수를 모아 연말에 계산해 보니 한 해 동안 한 절한 횟수가 16만 배나 되었다. 일년에 10만 배도 못해 허덕였었는데 한 해 동안 16만 배를 하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렇게 6년 동안 꾸준히 한 결과 올 2월에는 당초 목표인 100만배를 앞당겨 마칠 수 있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가능한 현실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부처님의 6년 고행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6년 만에 100만 배라는 가시적인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절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100만 배를 하면 뭐가 되는 줄로 알았다. 수행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길 바라고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중생심의 발로이다. 나도 그렇게 되리라 믿었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절을 하기 전에 절을 많이 한 누가 어떻게 되었고 어떤 가피를 입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 말이다.

 

100만 배를 회향한 지금 내게도 여러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해온다. 어떤 가피를 입었으며,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물론 한량없는 가피와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 있지만 말로 표현하면 도리어 싱거워지기에 그냥 빙긋이 웃고 말 때가 많다. 그래도 자꾸 보채면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달라지고 틀림없이 좋아지니 직접 한 번 해보라고. 자기가 직접 해보지 않고는 짐작만 할 뿐 알 수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머리로 이해하고 나서 믿으려 하는 폐단이 있다. 결과에 대해 분명하게 계산되는 일만 하려 들기 때문에 좀체 믿지 않고 행하려 들지 않는다. 알고 나서 믿으려면 세월 다 간다. 그런 사람에게 말로 하는 이런저런 설명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말하기 싫어질 때가 많다. 좋고 나쁜 것은 직접 해보면 금방 안다. 더구나 절수행은 그 좋고 나쁨의 결과가 어떤 것보다 빠르다. 하다못해 108배 한 번이라도 해보면 ‘아! 참 좋구나’ 하고 바로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무슨 구차한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자기 몸으로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 머리로 이해하려 해서는 백날천날 가도 헛일이다. 불교는 지식이 부족해서 못 믿고 못 행하는 종교가 아니다. 아는 지식은 행함과 별개의 문제다. 잘 되지도 않는 화두 참선한다고 끙끙댈 일이 아니다. 아무리 수승하고 빠른 길이라 하더라도 치열하게 부딪히지 않으면 작은 기쁨조차 얻기 어렵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하면 한 만큼 느끼고 깨달아 알 수 있는 절수행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멀리 있는 큰 것을 바라지 말고 가까이 있는 작은 것부터 하다 보면 크고 먼 것도 바로 내 곁에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절수행은 단순히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과 함께 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참회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자칫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유희에 빠져 생동감을 잃기 쉬운 불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쉽고도 효과적인 수행이 절수행이다. 절은 아상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나의 머리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상대의 발에 갖다 대는 행위가 절이다. 본래 높고 낮음이 없지만 모양 있는 형태의 내 머리와 나의 발은 차이가 분명히 높고 낮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므로 속아서는 안 되기에 내 머리를 상대의 발에 조아리는 것이다. 조아리고 또 조아려서 나라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조아린다면 절수행을 통해서 어찌 수승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겠는가?

 

염불과 함께하는 절수행이야 말로 현대인들에게 더없이 좋은 수행법이라 확신한다. 천번 만 번 버려도 아깝지 않을 ‘나라는 생각의 산"을 허물기 위해 나는 또다시100만 배의 대장정에 돌입할 것이다. 그리하여 높고 낮은 산과 골이 매워져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이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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