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마장
우룡 큰스님
요즈음의 많은 불자들은 단순한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실천불교·수행불교 속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이타행에서부터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전을 외우는 등의 마음 닦는 공부를 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의 공부, 곧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공부를 할 때 나타나게 되는 장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애를 잘 알 때, 장애를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참으로 공부를 잘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 깨달음의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각종 장애를 불교에서는 ‘마장’이라고 하는데, 마장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마(喜魔)·비마(悲魔)·포마(怖魔)
옛부터 불교에서는 이 마를 3마, 4마, 8마, 10마 등을 설명하였고, 능엄경에서는 ‘50종변마사’라 하여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50가지 마구니의 길을 아주 상세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는 거의 대부분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외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보다 깊은 것이 있습니다.
표면적인 마에는 우리가 수시로 일으키는 번뇌망상을 비롯하여 공부를 할 때 자꾸만 생겨나는 의심·게으름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러한 마장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 마음을 단속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우리의 일상생활이 파도 따라 움직이는 삶인데 비해 마음공부를 하는 생활은 파도를 잠재우는 행위이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전의 버릇이 마가 되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마는 초기단계의 아주 얕은 마 이므로, 일어나는 번뇌와 벗하지 않으면서, 원력을 굳건히 하고 마음을 잘 단속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도(道)가 성숙한 때 일어나는 마입니다. 곧 의식 세계에서의 번뇌가 아니라 잠재의식·무의식적인 마가 그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고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어떤 모습 등을 10년, 20년 후에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경우를 경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잠재적인 기억능력은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파도 따라 출렁이는 고된 삶을 살다 보면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두려웠던 일들이 차츰 잊힙니다. 그러한 감정들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을 뿐입니다.
기도·참선 등의 공부를 할 때 출렁이던 파도가 잦아들고 마음이 차츰 맑아지게 되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간직되어
있던 감정이 마구니가 되어 깨달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단계가 아니라, 백일기도를 하였다면 적어도 반 이상의 기간이 지났을 때, 참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화두가 잘 들린다고 생각될 때 쯤 찾아드는 것입니다. 이렇듯 수행중일때 수행자에게 자주 나타나는 마로는 희마, 비마, 포마가 있습니다. 이들 하나하나를 실제 예를 통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젊은 시절 백일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새벽, 오전, 오후, 저녁 네 차례씩 하루 8시간 이상을 정성껏 기도하기를 60일 정도 지났을 때 웬지 모르게 하염없이 기쁘고 좋았습니다. 마냥 싱글벙글 웃으며 염불하고 웃으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나의 자의적인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도반 하나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잔뜩 찌푸려 있는데도 나는 옆에서 마냥 웃었습니다.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본 은사 고봉스님께서는 크게 꾸짖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웃고 있다니 ! 이놈아, 너는 오장육부도 없고 간도 쓸개도 없느냐?”
꾸중을 들으며 입으로는 ‘잘못했습니다.’ 하면서도 나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일주일 가량 이어지다가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터져나오는 웃음과 뭔지 모르는 기쁨의 상태, 이것이 바로 희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과 웃음’이 함께 하는 것이 어째서 마장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깨달음의 법열(法悅)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잔잔한 기쁨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웃음보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과도 같아서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곧 자제력 없는 웃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마보다 더 한 것은 슬픔의 마구니에 빠져 버리는 비마입니다.
현재 부산에서 큰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경주 불국사의 관음전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두 시간,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씩 기도하는 사분정근을 행하되, 먼저 천수경을 외우고 그다음에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60여 일이 지나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들어가 처음 향을 꽃아놓고 천수경을 외울 때는 괜찮은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보면 어느 틈에 목탁채는 목탁채대로 어디로 던져버리고 그 스님은 스님대로 자리에 엎어져 ‘엉엉’ 우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묘한 것은 시간가는 것도 잊은 채 펑펑 울다가도 기도가 끝날 때쯤 되면 울음이 저절로 멈추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내가 마섭 을 당했구나. 정신을 차려야지.’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행한 이튿날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목탁은 이쪽에, 목탁채는 저쪽에 나가떨어져 있고 엎드려 실컷 울었던 좌복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으며, 눈은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속지 않아야지, 정신을 차려서 잘하리라.’ 하지만 그 이튿날도 전날과 다를 바 없었고, 비마에 쉽싸인 이러한 상태는 열흘 정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동산큰스님께서 부산 범어사의 조실로 계실 때 선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십 명의 스님이 열심히 좌선정진을 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한쪽 발 끝으로 바닥을 짚고 서서 찡얼찡얼 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주변 스님들이 그의 몸을 흔들자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습니다.
“어?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지?” 자세한 까닭을 묻자 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무엇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2∼3mm 크기의 불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수천수만 명이나 되는 조그마한 사람들이 불개미떼처럼 내 곁으로 몰려들더니, 옷자락으로라도 건드리면 터져 죽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에게 옷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옷을 추스려도 보았지만 차츰 무릎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눌려 죽을 것 같아 발바닥을 딛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발바닥 밑으로 파고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차츰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나중에는 한쪽 발로만 서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고 옷을 붙들고 매달리며 올라오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눌려 죽들 것만 같은 그들! 그 사람들이 너무도 불쌍하고 또 감당할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이상의 두 이야기에서처럼 슬픔의 마구니인 비마에 빠지면 자꾸 울게 됩니다. 까닭도 없이 자꾸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울고 혼자 있으면서 울고, 절하면서 참선하면서 계속 눈물을 홀립니다. 뚜렷한 감회의 눈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눈물이 슬픔인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정신을 가로막는 포마(怖魔)는 한동안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의 마구니에 걸리면 기도를 하는 법당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집니다. 법당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집니다.
사천 다솔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지냈던 젊은 시절, 나는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끝에 법당에서 두 시간씩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엄하신 은사스님께서 법당 문 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다 말고 “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계속 기도를 하였고, 은사스님은 부르다가 부르다가 화가 나셨는지 법당 문짝을 발로 ‘쾅’ 차버리고 가는 것 같은 형상이 내 귀에 들려왔습니다. ‘스님께서 부르다가 화가 나서 문짝을 차버리고 가시는구나.’ 이런 생각까지 기도한 도중에 분명히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난 다음 은사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가 기도하고 있을 때 법당 밖에 오셔서 저를 부르셨는지요?”
은사스님은 “그런 일 없다.” 은사스님께서는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기도정진 등을 하다보면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분이 나타나 방해를 함으로써 기도를 멈추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심하게는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하고 있는 ‘나’에게 느닷없이 큰 몽둥이를 든 사람이 나타나 두들겨 패는 듯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강한 망상이 일어나면 두드려 맞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 피하기도 하고 법당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와 같은 망상의 몽둥이를 맞아 목탁을 팽개치고 법당 바닥에 넘어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한 두려움의 마구니에 횝싸이는 경우에는 ‘머리끝이 쭈뼛한’ 정도가 아닙니다. 머리털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털 하나하나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잡아당기는 듯한 공포에 횝싸입니다. 위로 난 털은 위로 잡아당기고 아래로 난 털은 아래로 잡아당기고, 그야말로 ‘몸뚱이가 딱 얼어붙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쁨의 마구니, 슬픔의 마구니, 두려움의 마구니, 실로 마음공부를 잘 해나가는 사람에게는 마구니의 시련을 겪게 되는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한 평생 기도를 하면서도 이러한 고비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만큼 기도에 전심전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희마,비마,포마 등의 마 가 나타나 더라도 조금도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결코 여기에 속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벗하지 말고 계속 ‘관세음보살’에 집중하면 되고,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만 밀고 나가면 모든 마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말씀에, “도가 깊어지면 마가 더욱 성해진다.”고 하였듯이, 특별한 마가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도가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곧 의식의 세계보다 더 깊은 잠재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응어리를 녹이는 고비라는 것을 알고, 흔들림
없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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