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마장에 대하여!
우룡 큰스님 (울산학성선원 조실)
요즈음의 많은 불자들은 단순한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실천불교·수행불교 속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이타행(利他行)에서부터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전을 외우는 등의 마음 닦는 공부를 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의 공부, 즉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공부를 할 때 나타나게 되는 장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애를 잘 알 때, 장애를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참으로 공부를 잘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 깨달음의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각종 장애를 불교에서는 ‘마장(魔障)’이라고 하는데, 이 마장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희마(喜魔)·비마(悲魔)·포마(怖魔)
옛부터 불교에서는 이 마를 3마(魔)·4마·8마·10마 등을 설명하였고, "능엄경"에서는 ‘50종변마사(五十種辨魔事)’라 하여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50가지 마구니의 길을 아주 상세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는 거의 대부분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외마(外魔)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보다 깊은 것이 있습니다.
표면적인 마에는 우리가 수시로 일으키는 번뇌망상을 비롯하여 공부를 할 때 자꾸만 생겨나는 의심·게으름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러한 마장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 마음을 단속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우리의 일상생활이 파도 따라 움직이는 삶인데 비해, 마음공부를 하는 생활은 파도를 잠재우는 행위이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전의 버릇이 마가 되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마는 초기단계의 아주 얕은 마이므로, 일어나는 번뇌와 벗하지 않으면서, 원력을 굳건히 하고 마음을 잘 단속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도(道)가 성숙한 때 일어나는 마입니다. 곧 의식 세계에서의 번뇌가 아니라 잠재의식·무의식적인 마가 그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고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산천이나 어떤 모습 등을 10년, 20년 후에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경우를 경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잠재적인 기억능력은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파도 따라 출렁이는 고된 삶을 살다 보면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두려웠던 일들이 차츰 잊혀집니다. 그러한 감정들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참선 등의 공부를 하여 출렁이던 파도가 잦아들고 마음이 차츰 맑아지게 되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간직되어 있던 감정이 마구니가 되어, 깨달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곧, 참선공부나 기도의 시작단계가 아니라, 백일기도를 하였다면 적어도 반 이상의 기간이 지났을 때, 참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화두가 잘 들린다고 생각될 때쯤 찾아드는 것입니다.
이렇듯 수행자에게 자주 나타나는 마로는 희마, 비마, 포마가 있습니다. 이들 하나하나를 실제 예를 통하여 살펴 보도록 합시다.
내가 젊은 시절 백일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새벽, 오전, 오후, 저녁 네 차례씩 하루 8시간 이상을 정성껏 기도하기를 60일 정도 지났을 때 왠지 모르게 하염없이 기쁘고 좋았습니다. 마냥 싱글벙글 웃으며 염불하고 웃으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나의 자의적인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도반 하나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잔뜩 찌푸려 있는데도 나는 옆에서 마냥 웃었습니다. 그야 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본 은사 고봉스님께서는 크게 꾸짖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웃고 있다니 ! 이놈아, 너는 오장육부도 없고 간도 쓸개도 없느냐?” 꾸중을 들으며 입으로는 "잘못했습니다"하면서도 나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일주일 가량 이어지다가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터져나오는 웃음과 뭔지 모르는 기쁨의 상태, 이것이 바로 희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과 웃음"이 함께 하는 것이 어째서 마장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깨달음의 법열(法悅)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잔잔한 기쁨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웃음보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과도 같아서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자제력 없는 웃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희마보다 더 한 것은, 슬픔의 마구니에 빠져 버리는 비마입니다. 현재 부산에서 큰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경주 불국사의 관음전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두 시간,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씩 기도하는 사분정근을 행하되, 먼저 "천수경"을 외우고, 그다음에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60여 일이 지나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법당에 들어가 처음 향을 꽃아놓고 "천수경"을 외울 때는 괜찮은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보면,어느 틈에 목탁채는 목탁채대로 어디로 던져버리고 그 스님은 스님대로 자리에 엎어져 엉엉 우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묘한 것은 시간가는 것도 잊은 채 펑펑 울다가도 기도가 끝날 때쯤 되면, 울음이 저절로 멈추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내가 마섭(魔攝)을 당했구나. 정신을 차려야지."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행한 이튿날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목탁은 이쪽에, 목탁채는 저쪽에 나가 떨어져 있고 엎드려 실컷 울었던 좌복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으며, 눈은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속지 않아야지, 정신을 차려서 잘하리라." 하지만 그 이튿날도 전날과 다를 바 없었고, 비마에 쉽싸인 이러한 상태는 열흘 정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동산(東山) 큰스님께서 부산 범어사의 조 실로 계실 때 선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십 명의 스님이 열심히 좌선정진을 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한쪽 발 끝으로 바닥을 짚고 서서 찡얼찡얼 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주변 스님들이 그의 몸을 흔들자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습니다.
“어?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지?” 자세한 까닭을 묻자 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무었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2∼3mm 크기의 불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수천수만 명이나 되는 조그마한 사람들이 불개미떼처럼 내 곁으로 몰려들더니, 옷자락으로라도 건드리면 터져 죽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에게 옷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옷을 추슬러도 보았지만 차츰 무릎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눌려 죽을 것 같아 발바닥을 딛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발바닥 밑으로 파고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차츰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나중에는 한쪽 발로만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고 옷을 붙들고 매달리며 올라오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눌려 죽들 것만 같은 그들! 그 사람들이 너무도 불쌍하고 또 감당할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이상의 두 이야기에서처럼 슬픔의 마구니인 비마에 빠지면 자꾸 울게 됩니다. 까닭도 없이 자꾸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울고 흔자 있으면서 울고, 절하면서 참선하면서 계속 눈물을 홀립니다. 뚜렷한 감회의 눈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눈물이 슬픔인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정신을 가로막는 포마(怖魔)는 한동안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의 마구니에 걸리면 기도를 하는 법당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집니다. 법당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집니다.
사천 다솔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지냈던 젊은 시절, 나는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끝에 법당에서 두 시간씩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하신 은사스님께서 법당 문 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다 말고 “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계속 기도를 하였고, 은사스님은 부르다가 부르다가 화가 나셨는지 법당 문짝을 발로 ‘쾅’ 차버리고 가는 것 같은 형상이 내 귀에 들려왔습니다.
"스님께서 부르다가 화가 나서 문짝을 차버리고 가시는구나." 이러한 생각까지 기도한 도중에 분명히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난 다음 은사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가 기도하고 있을 때 법당 밖에 오셔서 저를 부르셨는지요?”
그러자 은사스님은 “그런 일 없다.” 은사스님께서는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기도정진 등을 하다보면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분이 나타나 방해를 함으로써 기도를 멈추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심하게는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하고 있는 나에게 느닷없이 큰 몽둥이를 든 사람이 나타나 두드려두들겨 패는 듯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강한 망상이 일어나면 두드려 맞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 피하기도 하고 법당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와 같은 망상의 몽둥이를 맞아 목탁을 팽개치고 법당 바닥에 넘어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한 두려움의 마구니에 휩싸이는 경우에는 머리끝이 쭈뼛한 정도가 아닙니다. 머리털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털 하나하나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잡아당기는 듯한 공포에 휩싸입니다. 위로 난 털은 위로 잡아당기고 아래로 난 털은 아래로 잡아당기고....그야말로 몸뚱이가 딱 얼어붙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쁨의 마구니, 슬픔의 마구니, 두려움의 마구니, 실로 마음공부를 잘 해나가는 사람에게는 마구니의 시련을 겪게 되는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한평생 기도를 하면서도 이러한 고비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만큼 기도에 전심전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희마, 비마, 포마 등의 마(魔)가 나타나 더라도 조금도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결코 여기에 속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벗하지 말고 계속 ‘관세음보살’에 집중하면 되고,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만 밀고 나가면 모든 마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말씀에, “도가 깊어지면 마가 더욱 성해진다.”고 하였듯이, 특별한 마가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도가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곧 의식의 세계보다 더 깊은 잠재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응어리를 녹이는 고비라는 것을 알고, 흔들림 없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속기 쉬운 마(魔)
수행을 방해하는 ‘마’ 중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역경계(逆境界)의 마도 있고, 우리에게 아주 맞는 순경계(順境界)의 마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마장 중에서 보다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은 순경계입니다.
역경계는 ‘나’에게 맞지 않고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가지게 되지만, 순경계는 즐거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극복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순경계에 부딪히면 더욱 조심하고 더욱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실제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거나 ‘천수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다 보면 묘한 경우를 접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진을 하는데, 갑자기 관세음보살이 직접 화현 하여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쁘다.”, “잘났다.” “미인이다.” 라는 등의 이 세상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꽃 위에 서서, 때로는 공중을 등등 떠다니는 연꽃을 타고, 때로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입니다.
“장하다. 정말 잘하는구나.”때로는 어루만져주며 인정을 해줍니다. “네가 그토록 나의 이름을 열심히 불렀으니 이제 깨달음의 눈을 주리라. 기도는 그만 하도록 하여라.” 하지만 이것이 바로 ‘순연(順緣)의 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순연의 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진을 그만두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버립니다. 어떤 때는 더 나쁜 결과 속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지리산의 어느 암자에서 홀로 정진을 하였던 한 스님은 자칭 "불보살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현재 나이가 50세 정도 된 그는 이 절 저 절을 떠돌아 다니면서 자기가 가장 잘난 사람이요 공부를 마친 사람이라고 큰소리를 칠 뿐 아니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대하기가 일쑤였습니다.
하루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우리 절에 들렸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젖어 있길래, “우산을 갖고 다니지.” 하였더니 “무엇이 젖는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는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젖는 것은 젖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고 "나는 안젖는다."는 괴변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분명 공부를 잘못한 것입니다.
그뒤 다시 우리 절에 온 일이 있었습니다. 2층의 내 방에 있는데, 1층에서 인터폰으로 연락을 했습니다.
“스님, 괴스님 한분이 오셨는데요.?”
“그래? 저녁공양 드셨는지 물어보고 안 잡수셨다면 공양 차려 드리고 방을 마련해 주무실 수 있게 해 드려라.”
조금 지나자 다시 인터폰이 왔습니다.
“스님, 방에서 담배를 자꾸 피우고 방바닥에다 침을 마구 뱉어내시는데요.” 그래서 1층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공부를 마쳤다며 나다니던 바로 그 스님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의자를 방 복판에 갖다 놓고 올라앉아 간혹 ‘할’을 한답시고 고함을 꽥꽥 지르더니, 내가 방에 들어서자 멋쩍게 싱긋 웃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래? 법문도 알아듣는 사람에게 해야지, 마구잡이로 하면 못 써. 담배 피웠나?”
“귀신들이 하도 버글버글거려서 귀신을 천도하려면 담배를 피워야 합니다.”
자기의 눈에는 길거리든 방안이든 귀신이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귀신을 위한 법문을 한다며, 2-3분에 한 번씩 꽥꽥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방해가 되겠기에, "다른 곳에 가서 자라."고 하였더니 "돈을 주면 여관에서 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돈을 주자 대문 밖으로 나가는데, 따라나서서 보니 대문 밖 길에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을 쭉 뿌려놓았고 담배도 이곳저곳에 뿌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왜 이랬어? 네가 그랬어?”
“귀신 천도하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소리르 꽥꽥 지르며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혼자서 공부하다가 매서울 당하여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기도나 참선을 꾸준히 하다 보면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한 경계가 눈앞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날이 또렷이 보이기도 하고 남의 운명이 그대로 비치기도 하며, 불보살님이 나타나 시험을 하겠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듯 새로운 능력이 생겨나고 불보살님이 나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 경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정녕 이때가 문제입니다. 이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번뇌 때문에 일렁거리던 자기의 마음이 맑아져서 이제까지 비치지 않던 무엇인가가 비치는 것일 뿐, 아직은 완전히 맑아지고 밝아진 경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스스로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약 30년 전, 남해 보리암 옆의 한 토굴에서 종단의 큰스님 제자 한분이 준제주를 외우며 깨달음을 구하였습니다. 이 준제주는 7억 부처님의 어머니로 인식되어 있는 준제관음의 진언으로, 크고 작은 어떤 재난도 침범하지 못하고 부처님과 다름없는 복을 성취시켜 줄 뿐 아니라, 이 진언을 외워 가피를 입으면 도를 통하게 된다고 하여 예부터 널리 신봉되었습니다.
이 스님은 삼칠일(21일)을 기약하고 준제주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14일이 지나자, 남해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연꽃을 타고 나타나 자신이 있는 토굴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윽한 향내음에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 스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절을 올렸습니다.
“왜 그토록 열심히 나를 찾았더냐?”
“도를 이루고자 함에서 입니다.”
“그렇다면 너의 신심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
보살이 나타난 사실에 감격한 스님은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가지고 있는 칼로 손가락을 하나 베었습니다.
그러자 보살은 냉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손가락 하나 바치는 신심으로 도를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떻게 저의 신심을 뵈오리이까?”
“그대의 남근(男根)을 바쳐라.”
스님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눈앞의 보살님은 자취를 감추었고, 피범벅이 된 스님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차츰 의식을 잃어갔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보리암에 있던 몇 분 스님이 그곳에 왔으므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그 스님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 불교 집안에는 ‘금강수보살’을 열심히 외우면 금강수보살이 친히 나타나 견성(見性)을 시켜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생존해 계신 한 스님은 그 말을 듣고 ‘금강수보살’을 불렀습니다. 밤잠도 마다하고 공양도 하는 등 마는 등 열심히 금강수보살을 부르기를 50여 일, 홀연히 금강수보살이 나타나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법문 다음에 질문을 했습니다.
“계행을 잘 지키고 있느냐?”
“예, 잘 지키고 있습니다.”
“몸으로 계행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계행을 지켜야지.”
어려서 출가한 그 스님은 여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력 있는 여자와 대화를 하고 나면 홀로 있을 때 은근히 그리워지기도 하였고, 가끔씩은 "여자와 함께 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던 것입니다. 스님은 마음속의 비밀을 들킨 듯하여 금강수보살께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견성할 수 있습니까?”
“음욕의 근원이 되는 성기를 끊어버려라.”
스님은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칼로 자신의 성기를 끊어버렸습니다. 순간 금강수보살은 눈앞에서 사라졌고, 스님은 견성은커녕 불구에 정신마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강수보살이 아니라 마구니의 유혹에 빠져든 것입니다. 다행히 그 스님은 큰스님의 지도 아래 참선을 하여 마의 장애에서 깨어났고, 지금까지도 중노릇을 잘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실화에서처럼 순경(順境)의 마구니는 역경의 마구니보나 더 크게 사람을 망쳐버립니다. 이 두 스님이 정녕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기도를 했다면 아무리 아름답고 존경하는 보살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순경에 대한 시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애착에 대한 시험입니다. 참으로 마구니를 잘 극복하려면 기도나 참선 중에 나타나는 순(順)과 역(逆)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마구니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임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집중의 노력 이외에는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이 다가오든 알 바가 아니다. 모두 터져버려라.” 정녕 이러한 자세로 정진해야 흔들림 없이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물며 앞일이 보인다고 하여, 남의 운명이 비친다고 하여 재미를 느낀데서야 어느 세월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까?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고비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비는 하나하나 넘겨야 합니다. 지금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번뇌망상의 괴로운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번뇌가 없는 원래의 깨달은 자리가 아니라 끝없는 방황과 윤회의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녕 자신을 사랑한다면 다가서는 마구니를 극복하면서 부지런히 공부를 지으십시오.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삼매를 이룰 그때까지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십시오.
삼매를 이루게 되면 나고 죽음이 없는 고비를 체험할 수 있게 되고, 나고 죽음이 없음을 확실히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대로 편안하고 행복하고 영광이 가득 찬 세계로 바뀝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결코 ‘마’가 아닙니다. 우리의 공부라는 자세입니다. 자세만 바르면 마는 결코 오래 벗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슷하게 일어나는 번뇌 망상과 고비고비에 모습을 나타내는 각종 마구니들이 우리를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로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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